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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늘 그러던대로 자다가 못내리는거나 마찬가지라생각하면 그리 나쁘진 않다. ㅎ
글 쓰기 취미는 있지만, 나만의 로망이 강하고, 중2병이 돋기도 하고, 부끄럼도 많고, 그닥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라서 써놓은 글을 공개하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다. 물론 모처에는 남녀 상열지사 글이 한다발 있기는 한데 싸그리 다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게 안되는 곳이라 가끔 자다가 하이킥도 함..ㅋㅋ 그렇기는 해도 별장이니까 해보고 싶은걸 좀 풀어놔도 될 것 같다. 나중에 지우는 것도 가능하고. 힛힛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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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떤 자도 새를 멈추게 할 수 없으며, 아무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려들지 않았고, 또한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사냥하려 하지 않았다. 그 새는 굶주림이나 고통에 구애받지도 않았고 언제부터 그 새가 나타났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랜 세월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뿐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생물들에게 빠짐없이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하는 인간들도 그를 그저 '새' 라고만 불렀다. 마치 하늘의 태양과 구름과 별을 대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들도 기원을 알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그는 '새'라고 불리면서도' 날개가 없었으며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가 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새 자신조차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일부 인간들이 그 신비함을 '종교적인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새는 그것이 신앙의 형태가 되기도 전에 그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새를 만들었던 '마이스터'는 그의 역작으로 남을 그것이 부디 자유롭기를 원했기에, 막 탄생한 그에게 '자유의 세례'를 내렸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도록, 그러나 허무한 자유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새의 마음에 호기심을 새겨주었다. '마이스터'의 바람대로 새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알고 배우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때때로 새는 그들의 언어를 배워 말을 걸기도 했다. 바로 대답을 돌려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새는 호기심과 함께 인내심이 강했기에 해답을 얻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켜보고 배우고 그 자신이 채워졌다고 느꼈을 때, 새는 비로소 다시 멀리 날아오르곤 했다.
새가 다시 대지에 내려앉은 것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에서 꽤 벗어나 있는 어느 외딴 집을 발견했던 날이었다. 집은 그리 작은 크기도 아니었지만 주변의 풍경에 스며있듯 서 있어서 숲마저도 마치 그 집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집 밖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따사롭게 볕이 내리쪼이는 날이면 그는 언제나 마당으로 나와 끊임없이 무언가 쓰고 지우고,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식물에서 얻은 거친 실로 만들었지만 고귀한 자들의 옷처럼 바닥에 질질 끌리는 기다란 덧옷을 입고, 어깨 너머까지 기른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 넘긴 그 남자는, 간혹 외알 안경을 툭툭 두드려가며 혹은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다지 자주 바뀌지는 않았지만 완고하고 냉정한 듯 하다가도 가끔씩 곤란해 하는 듯 찌부러지는 표정이나, 홀로 있으면서도 산야에 묻혀 사는 평범한 인간과는 구분되는 우아한 행동거지를 구경하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만약 그가 지금 번화한 도시에 있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고귀한 인간들 틈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존재감과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이라고 새는 생각했다. 새는 점점 그 남자에게 그 자신이 몰두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게 하고 싶었고,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어졌다.
새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는 그동안의 관찰을 통해서 남자가 귀머거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굳이 자신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쓰고 지우는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어서 새는 그가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수많은 언어와 문자를 알고있는 자신도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쓴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글자였고 어쩌면 그것이 그림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새가 어디에 앉아있든 자신의 주변에서 무엇을 하든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새는 말 걸기를 멈추지 않았다. 존재한 시간만큼이나 많은 언어와 지혜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달이 3번 차고 기울었을 때, 새는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소비해 버렸으나 가볍게 한숨을 토했을 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목을 울렸다. 그 소리 자체에는 어떤 뜻도 담겨있지 않지만 누구나 듣고 느낄 수 있는 것, 노래였다.
흥얼거리듯 노래를 시작하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새는 어떤 언어에도 반응하지 않던 그 남자가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반응은 그 뿐이었기에 새는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노래했다. 낮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자랑스럽게 하늘을 딛고 높게 날아오르는가 하면, 깃털이 공기를 타고 춤추듯 떠도는 것처럼 부드럽게 하강하기도 했다. 노래에 스스로 도취되어 새는 처음 노래를 시작한 목적을 잊어버린 채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며 자신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만족스럽게 긴 노래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새는 외알 안경을 벗어 손에 걸치고 한손으로는 턱을 감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별일이군.”
남자의 단정한 외모만큼이나 정결함이 감도는 맑은 목소리였지만 새가 기다려왔던 대답치고는 꽤 볼품없었다. 게다가 기다림을 보상해주기는커녕 냉정하게 잘라버리듯 또렷하게 울린 남자의 말은 처음 새가 말을 걸었을 때 사용했던 언어였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 불편해진 새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역시 일부러 모른 척 한 거였군요.”
“그래, 내게 무슨 볼일이지?”
왜 무시를 했었는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바로 용건을 물어오는 남자에게 새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려 부던히 노력했었지만 어떻게 해서 자신이 보름달이 3번 뜨는 꼴을 보게 됐는지, 처음 목적을 떠올리기에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몰입했던 탓이었다.
“…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에 쓰려고?”
남자는 다시 안경을 쓰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인간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잦지는 않아도 오랜 세월을 감안하면 새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곱씹어 보아도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새에게는 엉뚱하게도 날이 선 대꾸조차 흥미롭게 들렸다. 경험하지 못했던 기묘한 불쾌함은 본능적인 호기심을 부추겼기에 새는 남자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다.
“당신 표정이 재미있으니까요.”
“….”
그러한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남자를 보며 새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그의 책상으로 쓰이고 있는 나무 탁자에 느슨하게 걸터앉았다. 새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같은 새가, 한낱 인간의 표정 하나에 까지 호기심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당신, 나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날 모른 척 한 거죠?”
남자가 흘린 '너 같은' 이라는 말에 새는 눈동자를 반짝였지만 남자는 혀를 차며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화창하던 하늘에는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그는 어지럽게 펼쳐 두었던 책들을 덮고 탁자에 널려있는 종이들을 서둘러 갈무리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승리감에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새는, 그가 자기를 내버려두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릴까봐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마치 대답을 할 것처럼 잠깐 멈춰선 남자는 어느새 잔뜩 찌푸려져 버린 하늘이 한번 울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후둑후둑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대답해줄 의무가 없다며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린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굵어지는 빗방울 속에 남겨진 새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비를 피할 곳은 그의 집 현관아래 뿐이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떤다거나 병들거나 할리는 없지만 새는 옷이 젖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젠가 만났었던 한 상인에게 선물 받은 옷을 새는 소중히 여기고 있었고, 그것은 새 자신과는 달리 수명이 있었기에 이미 낡아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는 현관의 작고 둥근 지붕 아래로 몸을 피하고 문에 기대섰다. 3달도 아니고, 비만 그치면 남자가 다시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자신의 낙천적인 점이 새삼 자랑스러워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바닥에 자국을 남기는 것을 새삼 흥미롭게 바라보던 새는, 갑자기 뒤쪽에서 덮쳐온 밀쳐내는 힘에 그대로 그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덜컥!
“우와아악!!!”
-철퍼덕!!
“․ ․ ․ .”
비가 그치기 전까지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오산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문을 열어 젖혔고, 덕분에 새는 보기 좋게 마당으로 굴렀다. 잠깐의 침묵 동안 남자는, 항의를 담아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새를 어이없다는 듯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여기 서 있었던 거지?”
“비를 피하고 싶었으니까요!”
새가 투덜거리면서 진흙으로 더러워진 옷을 털어보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금방 저절로 아물어버릴 피가 나는 무릎보다는 보다 찢어져버린 낡은 옷에 더 신경이 쓰였다. 새가 하는 모양새를 잠깐 지켜보던 남자는 말없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다시 우산을 받쳐 들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을 때, 새는 하던 일을 포기하고 그냥 비를 맞으며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말없이 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은 새를 일으켜 세운 다음에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홀로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새를 보며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흙비에 딩구는 게 마음에 들면 그대로 있던가.”
남자는 여전히 딱딱한 말투로 말했지만, 새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2층 정도로 보였던 그의 집은 천장이 무척 높았다. 천장 덕분에 날아다녀도 부족함이 없을 집이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그곳을 흙탕물을 떨어뜨려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에 새는 입구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남자가 갈아입을 옷을 주며 대강대강 손짓으로 알려준 욕실에서 흙탕물과 비에 젖은 몸을 씻어내고 나오자, 탁자 위에서 김이 오르는 따뜻한 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들처럼 자기 몫으로 준비된 차의 온기에 추위를 달래는 것 따위는 새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었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인 것은 아니었다.
“당신... 실은 좋은 사람이었군요.”
새 나름대로 표현한 감사의 말에 남자는 머금었던 차를 뿜을 뻔했다가 간신히 액체를 안으로 삼켜냈다. 새의 얼굴에 차가 퍼부어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지만 탁자가 덜컥하고 흔들리는 바람에 새 몫의 차가 잔 밖으로 살짝 넘쳐흘렀다. 멋쩍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한 번도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어서겠지만, 좋은 사람의 기준이 꽤 단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남자의 싸늘한 한 마디에 어색한 공기가 탁자 주위를 쓸고 지나갔다. 남자는 밖에서와는 달리 새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화사한 금빛 털을 가진 이 새는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고,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거 어디에다 말리면 될까요?”
새는 조금 전까지 입고 있었던 낡은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남자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옷을 받아서 벽난로 가에 널었다.
상대가 묻지도 않았건만, 새는 언제 그 옷을 얻게 되었으며 누가 주었는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남자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새는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풀어놓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것이 굉장히 즐거운 일임을 느끼며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새가 늘어놓는 이야기처럼 비는 금방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가 그친 후에도 새는 떠나지 않고 남자의 숲에 머물렀다. 그렇게, 새와 남자의 묘한 공존이 시작되었다.
*
새는 남자에게서 ‘자신의 존재’에 관련된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 외에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을 퍼부었다. 남자는 언제나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웠으나 답을 일러주었으며, 그를 굳이 쫓아내지도 않았다.
한번은 남자가 새의 난처한 질문에 곤란해 하다가 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새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인간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 신기하게 여기며 기뻐했다. 또한 화가 난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는 것을 보며, 오히려 희고 창백하던 피부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아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상들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새를 보며 화가 치솟다가도 어이가 없어진 남자는 펼쳐두었던 책을 덮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새는 아침이 되면 그가 자신을 쫓아내거나 질문에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을까봐 걱정하면서 그날 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 후, 남자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살갑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새에게 먼저 말을 거는가하면, 비 오던 그날 이후 나눠주지 않았던 차를 따라주기도 했다. 새가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식사 때 새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자주는 아니어도 음식을 나눠주며, 마치 관찰하듯이 감상을 물어보기도 했다.
새에게는 남자의 조그만 변화에도 기뻐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가 변한다는 것, 목적이야 어쨌든 자신에게 흥미를 둔다는 사실에 작은 성취감 혹은 충만한 기분을 느끼며, 언젠가는 그가 외면했던 대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는 분명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알고 있음을 숨기는 것에 실패한 것인지, 일부러 흘린 것인지 의문이 들 무렵, 새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비꼬면서 말했다.
“수천 년간 멍청하게 잘 날아다니다가 이제 와서 새삼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새는 이질적인 불쾌감을 느끼면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너는 창조주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은 자유의 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은 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타고난 자신의 영생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으며, 흥미롭게 세상을 굽어보는 것을 낙으로 살아갈 운명이겠지. 네 빌어먹을 낙천적인 바보스러움은 널 만든 자의 실수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나로서는 만약 그 축복에 금이 간다면 어떤 꼴이 될지 꽤 흥미가 생기고 있는 참이야.”
남자는 말을 덧붙이면서 묘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어떻게 나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죠?”
“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고 전에 일러두지 않았나? 나는 신을 대신하여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새에게 이름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 존재에 대해 무지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내 이름도 말해줄 수 있겠군요! 난 내 이름을 몰라요.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새는 그의 미간에 새겨진 고민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남자는 튼튼한 금속과 가죽 재질로 감싸인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온통 붉은 색의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 들은 새들의 이름이다. 이 종이에는 신성한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한번 쓰인 후에는 결코 지우거나 고칠 수가 없지. 새를 만든 자는 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아이들을 만들었다. 때문에 나는 갓 태어나 아직 이름이 없는 아이들의 것을 쓰기 전에, 언제나 다른 종이에 쓰고 고치기를 반복해왔다. 네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하던 일도 그것이지.”
“여기에 내 이름도 적혀있나요?”
“아니.”
새의 질문에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금 태어난 어린 새도 아닌 자신이 왜 여태까지 이름 하나 없이 지냈는지, 왜 자신은 그것을 이제야 이상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자문했다. 당장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새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름을 주세요.”
남자는 조금 놀란 듯 새를 바라보았다.
“자유의 새가 스스로 날개에 족쇄를 매달려 하는구나.”
“하지만 내가 정말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겠군요.”
“위험한 도박을 하려 드는군. 만약 네가 나로 인해 이름을 갖게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예전의 '새'가 아니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여주는 이유는, 여기에 쓰인 새들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내가 네게 이름 주게 된다면 그 대가로 나는 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얻게 되고 너는 고통을 배우게 되겠지. 한번 내뱉은 말은 저 종이들 위의 글자처럼 절대 지울 수가 없어. 나는 네가 후회하게 될 것을 확신 할 수 있다.”
새의 말을 듣던 남자는 비웃듯이 말하며 빈 페이지를 펼쳤다. 그는 어제 결정이 난 새로운 새의 이름을 적을 참이었다.
"아르쿤딜.”
남자가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 어디선가 상아빛 깃털을 가진 작은 새가 날아와서 감사의 인사라도 하듯이 잠시 그의 주변을 돌며 지저귀다 그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남자가 자신의 손보다 더 작고 부드러운 몸을 조심스럽게 스다듬고 사랑스럽다는 듯 한번 입을 맞추자 아르쿤딜이라 불리운 그 새는 다시 날아올라 멀리 떠나갔다.
언제나 싸늘한 표정이었던 남자가 다정한 표정을 할 수도 있다는 점, 그것 외에 다른 특별한 점 부분이 없었다. 차라리 큰 도시의 시장에서 마술사라는 인간들이 신기한 속임수로 볼거리를 만들어 낼 때의 모습이 더 환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도 그의 명부에는 방금 펜으로 써넣은 듯 마르지 않은 붉은 글씨가 반짝였다. 새는 축축하게 묻어날 것 같은 그 흔적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려다가 남자가 저지하기도 전에 겁이 나서 스스로 손을 거두었다. 그냥 보기에는 붉은 잉크로 쓰여진 알 수 없는 흔적에 불과한 것이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대개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는 남자가 하는 신비한 일을 직접 보았고, 자신도 그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길 희망했다. 새는 그 후에도 끈질기게 계속 부탁을 했지만 그 때마다 피곤과 한숨이 섞인 경고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이 경고는, 전적으로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이름을 주는 순간,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너의 주인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는 보통의 새로 변화하게 된다. 살갗을 뚫고 날개가 돋아나는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을 비롯해서 유한한 생명이 가진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겠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도록 만들어졌어요. 그것조차도 변한다는 말인가요?”
“글세, 과연 어떨지?”
“시험해보고 싶군요. 당신도 실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죠?”
"....그래. 지긋지긋할 정도로."
새의 말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새는 여태까지 지겹도록 자유로운 삶을 누려왔기에 그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빛나던 총명함도, 자신만을 위한 '이름'의 매혹에 눈이 멀어버린 새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남자는 찌푸렸던 미간을 단정히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침 좋은 게 생각났어. 옛날에 아주 위대한 왕이 있었다. 빛의 축복을 받은 그는 백성들에게 빛의 신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하지만 너는 그보다 더 이전에 태어난 존재. 이제부터 그 왕은 네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
남자는 작게 웃으며 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엔릴.”
…이라고 그가 말했다. 남자는 그동안의 거절은 형식이었을 뿐, 이미 결정해 둔지 오래인 것처럼 연습이나 뜸들임도 없이 이름을 불렀다. 새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 남자는 이전에 충분히 이야기했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린 대가는 그 순간 새에게 돌아갔다. 무언가 안에서 부서져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욱신-하고 등과 어깨쭉지가 아파왔다. 새는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각의 이름이 '고통'이란 것을 알았다.
“나는 분명 경고했었다.”
남자, 아니 주인의 말이 귓전에 스쳤다. 이름을 들은 순간 새는 주인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고통을 증거로 ‘자유의 세례’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였지만 공기처럼 머물던 그것을 가볍게 여겼던 것을….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새, 즉 엔릴은 지금에서야 그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너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지. 내 이름은 '루체'다. 네가 나를 어떻게 부르던 상관없지만... 이것으로 나는 너의 주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다정하게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부축해주는 루체의 손길이었다. 그것은 예전에 그가 아르쿤딜에게 보여주던 태도와 다를 바가 없음을 느끼며, 엔릴은 고통과 두려움에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엔릴은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처음 알게 된 것들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자신을 두렵게 하던 처음 겪어보았던 고통의 감각은 사그러들어 있었고, 그가 지금 느끼고 배우는 모든 것은 수 천 년을 살아오면서도 겪지 못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조차도 그에게는 경이롭고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엔릴은 처음 루체의 집에 왔을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수많은 질문을 했고, 배움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엔릴은 루체의 주변을 날아다니다가도 일부러 말없이 어디론가로 달아났다. 루체는 주인이면서도 엔릴이 계속 곁에 머물거나 밖으로 떠나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가두거나 묶어두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날아가든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그의 다른 새들처럼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엔릴은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지는 않고 주인이 자신을 찾으러 오는지 아닌지 혼자만의 내기를 하며 기다렸다. 그럴 때 마다 해질녘이면 어김없이 성실한 주인은 그를 찾으러 와주었다. 엔릴은 그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고 기뻤으며, 속박되어 있는 것은 주인이라 불리우는 자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루체가 말해준 것처럼 이름을 얻은 이상 다른 새들처럼 특정한 형상을 가진 날개가 자라나게 되겠지만, 엔릴은 아직 그런 것이 없어도 예전처럼 날 수 있었다. 때문에 루체가 원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를 떠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엔릴의 기쁨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서서히 그는 자신이 왜 주인을 기다리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답을 듣기위해 기다렸던 3개월과, 지금의 기다림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와 엔릴은 정신없이 날아올랐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 주인, 루체일 것이다.
‘주인? 그게 어쨌다고.’
엔릴은 어디를 어떻게 얼마의 시간을 날아가서 땅으로 내려온 것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해는 이미 져버렸고, 자신은 새카만 어둠이 드리워진 숲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두려움과 추위, 배고픔, 그리고 잊고 있던 고통이 고개를 들었다.
-욱씬.
처음 루체가 이름을 불러주었던 날처럼, 등이 타는 것같이 뜨겁고 아팠다.
“루체… 루체…!”
엔릴이라는 이름의 새가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싫었다. 그를 부르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러도 그가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와 버렸을 것 이라는 생각에 안도감과 슬픔이 동시에 덮쳐왔다. 그러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등의 고통은 점점 강해질 뿐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보이지 않는 힘이 등뼈를 쥐고 뒤트는 듯한 아픔에 엔릴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엎드린 채 쓰러져 버렸던 엔릴은 빗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등을 누군가가 만져주고 있는 감각에 가만히 고개를 돌렸지만 부슬비만이 등을 두드리며 잔상처럼 남아있는 고통의 열기를 적셔주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죄여오던 고통도 가라앉았고 비를 맞아서 추웠지만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분명, 온몸이 흙투성이겠지.’
문득, 루체의 집 앞에서 비를 맞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추억보다도, 이토록 시린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을 그 당시에는 느낄 수 없었던 자신이 새삼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로 돌아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만, 날개가 자라는 고통이 잠시 사그러들었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엔릴은 체념하듯 흙탕물에 머리를 다시 쳐박았다.
-철벅
-…철벅
“…?!”
앞쪽에서 철벅이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도 한번 울렸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이는 소리가 빨라졌고, 엔릴은 그것이 누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비를 헤치고 들어오는 발소리의 수만큼, 빗방울이 우산에 부서지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는 자신이 싫었다. 엔릴은 이대로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발소리는 곧 멈추었고 부슬비와는 다른 감촉이 부어오른 등을 어루만졌다.
“무척... 괴로웠겠군.”
“…….”
“가엾게도, 너 자신의 선택이니 누구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있었겠지. 지금의 너는 예전과는 달라. 누군가가 너를 사냥하여 죽일 수도 있고, 차디찬 비에 모든 온기를 빼앗기고 죽을 수도 있는 존재로 추락했다는 걸 잊지 마라.”
엔릴은 루체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하늘처럼 어둡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고요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서 보란듯이 도망쳤다. 그런데도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웃는 것도 웃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왜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엔릴은 자신의 물빛 눈동자가 넘쳐흐르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게 된다면 무언가를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루체가 손을 들어 흙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부드럽게 훔쳤다. 진흙이 뒤엉켜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 흠뻑 젖은 금빛 머리칼을 털듯이 쓸어주는 그의 손길은 따뜻했다. 그는 엔릴을 부축해서 안고 한 손으로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마시도록 했다. 달콤하지만 씁쓸한 맛의 액체는 즉효성인 듯, 추위와 아픔이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그것을 대신하듯 수치스럽다는 감정이 밀려왔지만 엔릴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엔릴은 그저 좀 더 비를 피하려는 것처럼, 그가 벗어서 걸쳐주었던 겉옷을 끌어올려 뒤집어썼다.
이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날,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내자마자 엔릴은 추위를 호소하며 주인의 침대로 파고들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과 같지는 않았다. 온기를 구하며 팔을 얽어오는 엔릴을 바라보는 루체의 눈동자가 이렇게 어둡고 혼탁한 빛으로 흐려져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짜증을 내거나 엔릴을 거칠게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대신, 읽고 있던 책을 덮어버린 그는 쓰게 웃었다.
“너는, 내가 너를 따뜻하게 해주길 원하는가?”
엔릴은 그가 무슨 뜻을 담아서 말하는 것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루체는 엔릴이 이름을 얻은 후 신기해하며 알고 싶어 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몇 번을 졸라보아도 가르쳐주기를 거절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누린다는 쾌락이라는 감각이었다.
“엔릴...”
다정하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으나 그것은 엔릴을 구속하는 힘이 있었다. 마치 선언하듯 루체는 거듭 새의 이름을, 엔릴을 불렀다. 그리고 물기에 젖어 어두운 금빛을 한 엔릴의 머리칼에 손을 얽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너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해냈어요. 결국 나를 찾아냈어요.”
루체는 아직 붓기가 남아있는 등을 간질이듯 어루만지며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기대에 찬 표정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엔릴에게, 그는 이제서야 겨우 수줍음이란 것을 배웠느냐며 농을 걸기도 했다. 엔릴이 즐겨 입는 헐렁한 옷자락을 처음으로 밀어낼 때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루체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았던 시절에 마음껏 누렸던 육신의 욕망, 사명을 얻은 이후 그 감각을 버린 채 어떻게 지금까지 조용히 살아왔는지는 루체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경고해줄 자가 아무도 없군. 원하던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니, 고통스러워서 네가 후회하더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겠다.”
이 가르침에는 어떠한 지혜도 필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입맞춤은 격렬하고 뜨거웠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던 엔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루체가 하는 대로 몸을 맞기고 달아오르는 감각에 취해서, 그가 일러주었더나 ‘첫 경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잊었다. 그러나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의 감각은 거칠지 않았음에도 충격이 심했다.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등의 통증과는 달랐지만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아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루체를 붙잡고 사냥당한 짐승처럼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루..루체. 루체, 나...”
“쉬이... 괜찮아질 거야. 배와 다리에 힘을 빼.”
“너무... 아파서.. 마음대로 되지 않...”
루체는 머리를 스다듬어 주던 손을 아래로 뻗어 엔릴의 수컷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엔릴은 ‘새’였지만 외적으로는 젊은 인간남자와 다를 바 없는 육체를 갖고 있었다. 꽉 조여오기만 하던 것이 조금씩 이완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루체는 고개를 숙여 엔릴의 벌어진 입술에, 코에서 눈가를 지나 이마에 키스했다. 너무나도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기에 흐릿하게 잔상처럼 남은 기억이지만 그도 겪어본 적이 있던 아픔을 느끼고 있는 엔릴이 애처럽고 사랑스러웠다. 달콤한 흐느낌과 함께 상대가 처음 보다 익숙해졌다는 확신이 들자 루체는 인내의 한계에 닿았다. 그리고 고통과 쾌락으로 떨리는 한숨 소리와 삐걱이는 마찰음만이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소리에 조용히 섞여들었다.
열락을 나눈 후, 루체는 땀에 젖은 엔릴을 안고 등의 통증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름을 얻은 댓가로 한낱 새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이름을 가진 다른 새들처럼 '날개를 가진 새'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동안 고통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늘 마시는 차에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섞어서 우려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후회해도 늦은 일이라며 탄식했다. 이미 이름이 내뱉어졌기에 그것을 멈출 권한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말하며 엔릴의 이마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 후로 엔릴은, 루체에게 매달렸다.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들 때마다, 주인인 그에게 온기를 요구했다. 그가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안고 옭아맬 때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이 본성을 배반하면서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합당한 이유, 쾌락이라는 '조건'이 만족된다고 생각했으며, 그 순간만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주인이 생긴 새에게 자유의 세례는 이제 족쇄였지만 본성이 허락하는 족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엔릴은 혼란스러웠다. 변화하는 육체의 고통은 매일 마시는 약으로 누를 수 있지만 정신의 고통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편안한 주인의 품에서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에 반해 본능은 날아야한다고, 도망쳐야 한다고 채찍질을 계속했다.
엔릴은 차라리 주인이 자신을 묶어 가둬버리고 완벽히 구속했다면 마음이 이토록 고통 받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외적인 압력에 그저 발버둥 칠 수 있다면, 최소한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름을 얻고 싶은 마음에 엔릴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고 했었지만 결과는 예상한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어느 한쪽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끊임없이 엔릴을 괴롭혔다. 루체와 함께하는 생활이 편안하고 충만하게 느껴질수록 더 강한 충동이 밀려왔다. 결국 엔릴은 자유가 아닌 자유에 휘둘려 다시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예전보다 오래 날지 못했다. 무형의 날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처럼 어김없이 등의 통증이 덮쳐왔고,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한 엔릴은 금방 루체에게 발견 되었다.
엔릴의 도피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지만 루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는 엔릴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더 강한 약을 먹이면서 한숨을 쉬는 것 뿐이었다. 엔릴은 그 한숨이, 자신 뿐 아니라 루체 역시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통은 가셨으나 약기운에 취한 엔릴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루체에게 애원했다.
“안아줘요. 지금 당장….”
흐느적거리며 멋대로 몸을 겹쳐오는 엔릴을 몇 번인가는 곤란하게 밀어냈지만 예전 같은 인내심은 루체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엔릴은 주인의 품에 안기면서 애처롭게 울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망쳐 날아들었던 숲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홀로 그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그 부름에 답하듯 루체는 새의 이름을 부르며 조금 전의 거절이 무색하도록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몇 번이나 살을 섞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엔릴이 정신을 차렸을 때 루체는 곁에 없었다. 여전히 졸렸고 묘하게 달콤한 향 냄새에 편안하고 노곤한 기분이 들어 다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잠에 취한 채 엔릴은, 주인과 열락을 나눈 후 약 기운이 남아있는 와중에 자신이 또 날아가 버리려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이 지금 루체의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잠에게 자신을 맡겨버렸다.
더 이상 향냄새도 나지 않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지만 루체는 보이지 않았다. 날아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고 강요하던 본성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주인이 곁에 없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엔릴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날아오르려 할 때의 통증은 여전했다. 주인 없는 빈 집에서 막연히 기다렸지만 그는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엔릴은 지하에 있는 루체의 서재에서 그가 남기고 떠난 것을 보고야 말았다. 언젠가는 보게 될 것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것은 책상 위에 잘 펼쳐져 있었다. 엔릴이 읽을 수 없어서 궁금해 했던, 그러나 지금은 읽을 수 있게 된 언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엔릴, 그 자신이었다. 그는 종이 위에 쓰인 것이 무언가를 이루는 법칙을 설명하는 일종의 설계도라는 것을, 그것의 결과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재의 책을 무너뜨리듯 뒤지기 시작했다. 루체의 필체로 채워진 책에는 그도 알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쓰여 있었고, 어김없이 그것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것뿐이었다. 이름이 쓰여야할 곳에는 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만이 남아있었다.
그 종이 조각에는 어떤 마력이 있었을까? 엔릴은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됨과 동시에, 태어나 처음으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던 곳이 이곳임을 기억해냈다. 마이스터가 그를 위한 이름을 채 붙여주기도 전에 자유의 세례를 받은 그는 눈을 뜨자마자 세상 밖으로 날아갔었다. 자신은 수 천 년의 시간을 넘어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어째서 그것을 잊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자유의 축복이 엔릴의 기억을 지운 것일지도 몰랐다.
루체는 창조된 것에 그저 적합한 이름을 붙여주기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신에게 창조의 임무를 받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를 만드는 마이스터였다. 어떤 새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창조주인 그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밀려들었다. 엔릴은 울부짖고 루체를 저주하며 처음으로 분노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온다면 퍼부어 주고 싶은 분노 이외에도,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잠깐이라도 집을 벗어난 사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날 수가 없었다.
분노와 어둠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엔릴은 루체가 왜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싫증이 나고 지친 그가 자신을 버린 것이라 여겼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내며 최종적인 결론을 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루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엔릴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결론을 내어 자신을 추스르려 했던 것이지만, 긴 기다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루체가 마이스터로서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감정 이상의 것을 가졌다는 것을... 겨우 피조물 때문에 자신의 집을 떠나는 창조주라니... 엔릴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았으며,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그의 부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다정하게 머리칼을 쓸어주던 손길이나 씁쓸하게 웃던 표정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언제나 고집을 부렸던 것은 자신이었다. 루체는 그를 못 본 척 하려했었고, 끊임없이 경고를 해 주었지만 결국에는 엔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엔릴은 그 날,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된 그 때 보다도 더 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주인을 사랑했음을, 자유를 대가로 얻은 것들 중 가장 값진 것이 이 감정임을 깨달았다. 엔릴은 사랑스러움과 슬픔 속에서 등의 고통이 다시 발작함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한편, 루체는 자신에게 창조의 의무를 부여했던 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엔릴이 괴로워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었을 때, 그제서야 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 알게 되었다. 몇 번이나 열락에 들뜬 푸른 눈을 보았었지만 왜 지금에 와서인지, 자신이 하게 될 후회가 어떤 종류였을 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다는 것에 탄식의 한숨을 흘렸다.
자신이 직접 새에게 부여한 호기심은 그를 만든 마이스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었으나 자유의 세례가 내려짐으로써, 세상의 이치로는 불완전한 존재로 떠다니던 새가 자신에게 나타났을 때,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르면서 함부로 시험했었다.
비로소 신의 발 앞에 당도한 루체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며 참회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되돌릴 힘이 있었고,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눈물어린 호소를 조용히 듣던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어리석은 루체, 나는 그대에게 새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의무를 부여했다. 그런데 그대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었지. 허나 내가 굳이 관여하기 전에 ‘그것’을 날려 보내어 스스로 현명한 결론을 내렸었다.”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여신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 때, 그대가 끝내 나를 기만하지 못한 것으로 용서를 할 수 있었고, 지금껏 한 번도 질책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대는 설마 내게 실패작의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 예까지 온 것인가? ‘그것’은 가엾게도 홀로 남겨진 채 괴로워하고 있겠지만 네 소망은 들어줄 수가 없구나.”
“엘리시아 님…!”
루체가 간절한 눈빛을 담아 여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를 책망하는 듯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어째서 그것을 내버려 두고 왔단 말인가? 이미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함께 많은 것을 잃었다. 설마 그대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내개 떠넘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더는 그대가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여신은 루체의 인사도 받지 않고 사라졌다. 그는 신전에서 물러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걱정이 앞선다고 해서 쉽게 단축할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엔릴에게 돌아갈 생각만을 했다. 주어진 임무와 함께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의 이 남자는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는 신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속도로 집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지쳐있었다. 그는 무리한 여정의 길 위에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루체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집 앞에 와 있었다. 엔릴을 불쌍히 여긴 엘리시아님께서 하신 일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따사로움과 평화의 상징처럼 생각했었던 햇볕은 뜨겁고 습한 바람과 적막과 함께 기묘한 불안감을 부추겼다. 두려움을 누르며 다급하게 집의 문을 열어졎혔다. 바로 그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천장이 높은 홀의 빈 공간을 타고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는 몇 개의 하얀 깃털들이었다. 바로 그 아래에, 엔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누워있었다. 절망한 루체는 털썩, 무릎을 꿇였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을 덮듯이 눈앞의 영상이 사라졌다.
루체는 순간 놀라서 눈을 떴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었으며 어둠이 내려온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피로에 지쳐 쓰러져 잠들었고 그저 꿈을 꾸었던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꿈속에서 엔릴은 피투성이로 두 손에 자신의 날개와 깃털을 움켜쥐고 죽어 있었다. 스스로 날개를 잡아 뜯고 죽음을 택하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이었다. 비록 악몽이었지만 잠깐의 잠으로 휴식을 취했던 루체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가까스로 집 앞에 도착 했을 때, 조용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늘 흐트러짐이 없었던 루체의 모습은 부랑자의 것처럼 땀과 먼지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는 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한 실내는 소름끼칠 만큼 조용했지만,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얀 깃털이 날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몇 걸음을 옮기자, 나무 바닥에는 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과 무쇠와 같은 광택을 가진 검은 깃털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엔릴… 엔릴…!”
루체는 안타깝게 엔릴을 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검은 깃털을 움켜쥐었다. 핏자국 위로 맑은 액체가 뚝뚝 하고 떨어졌다. 핏자국은 분명 엔릴의 것일 터였다.
엔릴은 어디로 갔을까? 집안에서라면 누군가에게 사냥을 당했을 리는 없었다. 루체의 집은 그가 직접 만든 결계에 의해 인간들은 들어올 수 없도록 장치를 해 두었으니까. 밖으로 나갔다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밖에서 공격을 당해, 겨우 집 안으로 들어와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가능성이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엔릴이 여기 없다는 것이었다. 루체는 간밤에 꾸었던 꿈의 지배를 받아 그만, 검은 깃털을 가진 커다란 새가 그를 해쳤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색의 깃을 가진 새가 얼마나 강하고 사나운가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새를 벌할 힘과 권한이 있었다.
그 때 루체의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문가에 누군가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절망에 빠진 그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림자는 위로 가볍게 솟구쳐 올라 천장으로 날아올라 채광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검은 깃털이 한 장 빠져나와 주저앉아있는 루체의 눈앞에 살포시 떨어졌다. 그제서야 루체는 고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생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손으로 창조되었음에도 그가 알던 것과는 다른 새였다.
그가 없었던 몇 개월간 눈부신 금발을 어깨 아래로 길게 기른 엔릴이 밤하늘처럼 화려한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루체의 생각이 맞다면 날개의 성장 수준으로 판단할 때, 그가 신전에 도착했을 무렵 엔릴은 홀로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면서 날개를 펼쳤을 것이다. 눈가가 다시 뜨거워져 루체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벌하려 했던 검은 새는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엔릴이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마룻바닥으로 내려왔다.
“드디어 돌아왔군요.”
돌아와서 처음 들은 엔릴의 말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차가움을 담아 루체의 마음을 후벼팠다. 엔릴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살아있다면 하려고 준비했었던 변명도, 사랑한다는 말도 한낱 쓰레기조각이 되어 버렸다. 루체는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척해진 그의 뺨 위로 엔릴의 손이 겹쳐졌다.
“아, 당신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군요.”
엔릴이 처음 보았던, 홀로 있어도 우아하며 이지적이고 당당했던 루체의 모습은 지금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이든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어떤 질문에도 현명한 대답을 내놓던 그는 엔릴의 손길에 잠시 움찔거렸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바보 같은 내 아버지…, 내 주인님. 또 나 혼자서 3달을 떠들어야만 말을 할 건가요?”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날이 서있는 엔릴의 추궁에 루체는 겨우 입을 열었다.
“…계속, 너를 모른 척 했어야 옳았어.”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노래해야 했을 거예요. 나를 잘 알잖아요? 당신의 솜씨니까.”
엔릴의 그 말이 루체에게는 자신을 원망하며 비꼬는 것으로 느껴졌다. 엔릴을 버려두고 나오면서 보란 듯이 펼쳐두었던 ‘그것’을 발견한 것이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창조주의 권위를 잃지 않고 차근차근히 설명해주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래야만 했었던 것일까? 남자는 자신이 엔릴의 분노를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용서받기를 희망한다는 것에 그는 구역질마저 느껴졌다.
“나는… 너를 부숴놓은 주제에 용서받기를 원하는 내가 용납이 안 돼.”
엔릴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두었다. 사라진 온기를 대신해서 루체에게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가 온기를 호소할 때 그에게 손을 뻗은 것부터가 잘못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보다 전에, 만약 엔릴에게 끝내 이름을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자유의 세례를 내리면서, 처음 그를 만들고 나서 놓아주었을 때 품었던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터였다.
“꼴불견이지….”
루체는 중얼거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실, 그는 엔릴을 만들었을 때부터, 그를 위한 이름을 준비해왔었다. 그러나 그 새는 자유를 축복으로 받자마자 이름을 내리기도 전에 둥지를 떠났다. ‘새’라는 형식을 떠나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게 만들었던 것부터가 마이스터로서의 모험이자 일탈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실패작이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이것을 신께서 묵인해 주신 것은 이러한 대가를 치를 것을 예지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루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엔릴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루체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
“…….”
“이제 날개도 다 자랐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너는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놓아주마. 아니, 내가 떠나겠다.”
엔릴과 마주친 후 줄곧 그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했던 루체는 몸을 일으켰다. 엔릴은 가버리려는 루체의 팔을 잡아 붙들고 소리쳤다.
“도대체... 당신이 도망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루체는 우뚝 멈춰 섰다. 엔릴의 말이 옳았다. 도망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이미 여신께서 그에게 깨우쳐준 후 집으로 달려오는 시간동안에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루체는 팔을 구속당한 채 움직이지 않고, 죄를 인정한 죄수처럼 그에게 내려질 선고를 기다렸다. 그동안의, 때로 오만해 보일만큼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거짓말 같았다. 엔릴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를 위한 선고를 내렸다.
“나는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신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들어야 겠어요. 당신이 왜 나를 만들었는지를, 그때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루체는 엔릴에게 붙들려 자유롭지 못한 팔 대신 고개를 한번 저어 눈물을 떨궈내고 천천히 대답했다.
“난…, 그때, 신께서 허락하기 전까지는 평생 사명을 다하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와 그 세월을 함께 보낼 인간을 만들고 싶었다. 너의 겉모습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조금 우습지만, 나는 스스로의 솜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존재가 곧 살아 움직일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
하지만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해도 그건 ‘새’가 아니면 안 되었다. 진짜 인간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지. 결국에는 신의 분노가 두려워 너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너의 형상을 만들어 숨결을 불어넣은 나 자신으로 부터조차 자유롭도록, 너에게 자유의 축복을 내려주었지. 과연 너는 눈을 뜨자마자 나를 바라보기도 전에 날아가더군.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우연히 너는 네 둥지로 돌아오고 말았고, 나는... 내가 너를 나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기억나자 혼란스러웠다. 그 이후는 네가 알고 겪은 그대로다. 나는...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지고 말았다.”
지난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루체의 목소리는 갈라지긴 했어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팔을 붙들고 있던 힘이 스륵 풀려나갔다.
“내 존재의 이유는 그것이었군요.”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내가 너를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면 하겠다..”
그의 말에 엔릴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주 바라본 엔릴의 얼굴에는 낯선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이라면,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내 남은 생명이 다하기까지겠군요."
엔릴의 말에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토해냈다.
"미안하다."
이름을 준 그 날부터 한정된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 남자는 늘 이야기 해왔었고, 지금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인정해버렸다. 과연 자신의 남은 생명이란게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것이 언제까지이며, 만약 지금 단 하루가 남았던들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어봐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엔릴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 좀 해둬요... 아니, 당신에게 원하는게 있긴 하네요.”
루체는 젖어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당신 없이는 이제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으니까요. 물론, 루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엔릴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것에는 루체도 예상하지 못했던 진한 포식자의 향기가 밀려들어왔다. 루체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상상했다. 물론, 그것이 두렵다면 힘으로 그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체는 모든 것이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너에 대한 속죄가 된다면….”
엔릴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창조주이며 주인이라는 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탄하며 바라보았었던 아름답고 고고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더럽고 냄새나는 초라한 몰골로 나타나서 자존심도 내던진 한 인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럼에도 엔릴은 단 한 사람 뿐인 그 인간을 갖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 칭한 자의 갈라진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당신이 어떤 식으로 흐트러지는지, 얼마나 아름답게 눈물을 흘릴줄 아는 존재인지 충분히 가르쳐 주세요.”
계속되는 엔릴의 말에 루체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엔릴은 검고 커다란 날개로 주인을 감싸 안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이름을 불러줘요.”
- end


